일본편
1권 규슈 - 빛은 한반도로부터
2권 아스카,나라 - 아스크 들판에 백제꽃이 피었습니다.
3권 교토의 역사 -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4권 교토의 명소 - 그들에게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일본편3 교토의 역사,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저자 : 유홍준
펴낸곳 : 창비
2016년 읽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저자는 교토 답사기를 두 권으로 펴내면서 지역별이 아니라 역사편과 명소편으로 나누었다.
교토는 일본 역사에서 1천년간 수도의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문화의 진수가 여기에 다 있고, 일본미의 꽃이 여기에서 활짝 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찰이 13곳, 신사가 3곳, 성이 1곳으로 모두 17곳이나 된다.
교토의 관광안내서들은 낙중과, 그 외곽은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낙동, 낙서, 낙남, 낙북지역으로 소개하고 있다. 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시를 개조할 때 어소를 중심으로 토축을 쌓으면서 그 안쪽을 낙중, 바깥쪽을 낙외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교통의 편리를 생각하고 시간을 절약하자면 길 따라 나오는 유적지를 순서대로 보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공간만 생각하고 역사적 유래라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으면 핵심적인 미학이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아 교토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유홍준 작가는 교토 답사를 크게 다섯 갈래로 나누었다.
첫번째 코스는 교토가 일본의 수도로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기 전의 유적지들을 순례하는 것이다. 광륭사
두번째 코스는 헤이안시대(8~12세기) 개막과 함께 창건되어 일본불교의 양대산맥을 이룬 동사와 연력사이다.
세번째 코스는 우지에 있는 평등원을 답사하는 것이다.
네번째 코스는 백제계 도래인 후손인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헤이안시대에 세운 히가시야마의 청수사에 올라가는 것이다.
다섯번째 코스는 가마쿠라 시대에 창건한 사찰들의 답사다. 동복사, 고산사, 인화사
제1부 헤이안 이전
1) 광륭사
광륭사는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일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신라에서 보내준것으로 전하는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아주 비슷하다.
- 사진 : 오가와 세이요의 목조미륵반가상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75488&cid=46705&categoryId=46705
중용의 저자는 공자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며 어떤 사람은 노력해서 안다. (...) 그러나 이루어지면 매한가지다.>
이 대목에서 천재가 아닌 우리들이 희망을 갖제 되는 것은 '이루어지면 매한가지다'라는 사실 때문이다.(p.35)
광륭사는 603년에 건립된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나라의 법륭사, 오사카의 사천왕사 등과 함께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7대 사찰의 하나이다. 실제로 광륭사를 창건한 사람은 도래인 후손 진하승으로 쇼토쿠 태자의 측근으로 많은 공적을 쌓았다고 한다.
2) 하타씨 유적 순례
광륭사 태자전 옆에 우즈마사 신전이 있는데, 광륭사를 창건한 진하승을 신으로 숭배하면서 우즈마사 신명이라고 칭했다.
진하승의 진씨를 하타씨로 부른다. 진씨를 하타씨로 부르는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하타씨는 5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도래한 집단으로 도래 씨족중에서도 최대이고, 일본의 문화,경제,종교,기술,정치 등에 넓고 깊에 영향을 주었다. 하타씨의 거주 범위는 교토 분지 전체에 걸쳐 널리 퍼져 있었다. 마쓰오 신사, 누에 신사, 후시미의 이나리 신사 등이 하타씨가 창건한 신사들이다.
- 누에 신사
- 오사케 신사
- 아라시야마의 도월교 : 교토시민들이 많이 찾는 유원지, 노무라 젠자이(단팥죽)
도월교가 있는 곳은 하타씨가 큰 제방을 쌓아 대언천이라고도 불린다.
- 마쓰오 신사
한국인으로서 진하승을 모른다는 것은 아일랜드 사람이 미국의 케네디가 아일랜드 사람임을 모르는것과 같고, 스코틀랜드 사람이 미국의 카네기가 스코틀랜드 사람임을 모르는 것과 같은 셈이다
그리고 이미 이민간지 150년도 더 지난 하타씨의 진하승을 여전히 한반도 도래인이었다고만 강조하는 것은 아일랜드 사람이 케네디를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말하고, 스코틀랜드 사람이 카네기를 스코틀랜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결국 하타씨와 진하승은 한민족 이민사에서 첫번째 보이는 위대한 성공사례 정도로 기억하는 것이 마땅하다(p.91)
3) 야사카 신사와 기온마쓰리
- 마쓰리
일본은 스스로 말하기를 마쓰리의 나라라고 한다. 일본에서 일 년 열 두 달 어디에서든 마쓰리가 열린다.
교토의 3대 마쓰리로는 헤이안 신궁의 지다이마쓰리(時代祭), 가모 신사의 아오이마쓰리, 야사카 신사의 기온마쓰리가 꼽힌다.
- 헤이안 신궁 지다이마쓰리, 매년 10월 22일
- 가모신사 아오이마쓰리 매년 5월 15일, 6세 아스카시대부터 가모씨들이 흉작일 때면 음력 4월에 풍요를 기원하며 연 축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
- 야사카 신사 기온마쓰리 : 매년 7월 한달, 도쿄의 간다마쓰리, 오사카의 덴진마쓰리와 함께 일본 3대 마쓰리로 손꼽힌다.
고구려계 도래인인 야사카씨들이 세운 것이어서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 법관사 오중탑
- 기온거리
제2부 헤이안 시대
1) 후시미 이나리 신사와 고려사터
헤이안 시대 이전에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들이 세운 신사들이 교토 동서남북에 널리 퍼져있다
- 동쪽 : 야사카 신사 - 고구려계 도래인 야사카노 즈쿠리
- 서쪽 : 마쓰오 신사 - 신라계 도래인 하타씨
- 남쪽 : 후시미 이나리 신사 - 신라계 도래인 하타씨
- 북쪽 : 상,하 가모 신사 - 열도 내 도래인 가모씨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통일을 목표로 교토에 들어올 때 그가 주둔한 거성을 교토 동북쪽 오미의 아즈치에 두었기 때문에 아즈치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고 후시미성에 통할 때를 모모야마(桃山) 시대, 그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늘날 도쿄인 에도에 막부를 설치한 이래 그로부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날 때 까지가 에도시대이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하타씨의 후손 중 진이려구가 711년에 이나리산 세 봉우리에 신사를 세우고 제사 지내면서 창건한 것이라 한다.
여기서 모시는 신은 오곡풍요를 가져오는 농경신이었지만 나중에 상업 번영의 신을 모시면서 많은 딸림 신사를 두며 더욱 인기를 얻었다.
본전 뒤쪽 산 비탈에는 1천개의 붉은 도리이가 터널을 이루는 센본토리이가 있다.
2) 헤이안쿄 동사
동사에 얽힌 이야기는 길고 어렵다. 우선 동사는 헤이안쿄의 건설과 동시에 세워졌으니 헤이안쿄의 마스터플랜을 알아햔 한다. 그리고 동사는 공해스님이 진언종을 펼치면서 최징이 개창한 천태종의 연력서와 함께 헤이안시대 불교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진언종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언종은 진언밀교라 하는데 밀교가 무엇인지, 또 밀교의 만다라가 무엇인지 설명없이 동사에 가면 이 절이 내세우는 최고의 유물인 강당의 불상들을 보고는 그저 무섭고 괴이하다며 외면하듯 지나가고 말 것이다.
동사의 이야기는 헤이안쿄 건설부터 시작된다. 쇼무천황(재위 724~749)의 찬란했던 덴표시대가 끝나고 피로 얼룩진 왕위 계승전 끝에 등극한 간무천황은 부패한 귀족과 비대해진 불교세력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에 당시 수도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새 수도 헤이안쿄를 건설해 교토도 천도했다. 헤이안쿄 도성안에는 호족들의 씨사를 전혀 두지 못하게 하고 동사와 서사 둘만 세우고 이를 호국의 상징으로 삼았다.
동사는 헤이안쿄 천도 2년 뒤인 796년에 착공되어 금당과 몇 몇 건물만 지어진 상태에서 823년에 공해스님이 주지로 임명되면서 진언종 사찰로 태어났다. 그러나 완공은 공해 사후 50년, 착공 이후 장장 100년이 지나서였다.
무인들 전쟁과 오닌의 난 등 두 차례 파괴되었다 복원되었고, 지금의 모습은 17세기 에도 막부의 지원으로 재건된 것이다.
일본 불교의 성현, 공해와 최징
밀교의 만다라,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어로, 본질의 소유를 뜻한다. 즉 불성의 비밀스런 세계를 도상으로 그린 것이 만다라이다.
공해 스님은 이 난해한 만다라를 대중이 쉽게 이해하도록 불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이 강당안에 모두 21분의 존상으로 구성된 '입체 만다라'이다.
서사는 동사와 함께 축조되었고 그 규모도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990년 오중탑을 제외하고 대부분 불타버렸고, 가마쿠라 시대에 오중탑마저 불타버린 뒤에는 아예 폐사가 되었다.
3) 히에이산 연력사
교토 시내의 북쪽, 히에이산은 일본의 영산으로 칭송되며 그 깊은 산속에 있는 연력사는 지금도 성지순례하듯 많은 사람들이 찾아간다.
7~8세기 일본은 통일신라와 적대적인 상황은 아니어도 불편한 관계 속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한반도를 넘어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약 250년간 16차례 견당사를 파견했다. 이 시기 문화를 당풍문화라 한다.
최징은 804년 1년 동안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온 후 히에이산에서 천태종을 개창했다.
연력사를 찾아가는 길은 히에이산의 거의 정상까지 오르는 아주 힘든 산길이다. 특히 겨울에는 교통편을 잘 확인하고 가야한다.
4) 히가시야마의 청수사
교토 답사의 일번지는 단연코 청수사랄 할 만하다. 특히 봄 벚꽃과 가을 단풍의 청수사는 교토에서 명장면으로 이름 높다. 교토에 있는 수 많은 절 가운데 청수사가 가장 인기있는 것은 무엇보다 자리앉음새, 이른바 location이 탁월한 덕분이다. 그 자리앉음새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비견할만하다. 본래 절집이 들어앉기에는 부적절한 자리에 있따. 그러나 이 절을 지은 건축가는 본당을 앉히면서 벼랑의 가파름을 역으로 이용하여 무려 391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넓은 무대를 설치함으로써 본당을 남향으로 돌려 앉혔다.
청수사는 헤이안쿄 천도 직적인 8세 후반, 일본 역사상 최초로 정이대장군 칭호를 받은 사카노우에가 젊은 시절 발원하여 창건한 절이다.
성취원은 청수의 무대 왼편에 자리잡은 예쁜 정원이다.
청수당 본당안에 있는 28부중상
기요즈미 자카는 옛 전통상가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옛날 모습 그대로 옛 건물에 있는 상점이 많다. 대대로 그 자리에서 가게를 이어가는 노포에서 일본인들의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의무 같은 것을 읽게 된다. 전문인의 자부심, 장인정신을 존중하는 자세가 낳은 전통이다.
http://blog.naver.com/tripholics/220753017894
5) 우지 평등원
차(茶)로 유명한 우지는 교토의 동남쪽 후시미 아래에 있는 아담한 전원도시이다. 헤이안시대에 귀족들은 교토에서 그리 멀지 않고, 교통 편하고, 물 맑고, 풍광 수려한 이곳에 별장을 짓고 연회와 휴양의 장소로 삼았다.
우지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 둘 있는데, 하나는 우지가미 신사이고 또 하나는 우지 평등원이다.
평등원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1053년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우지의 별장을 사찰로 개조하면서 극락세계를 구현한 아미타당(봉황당)을 짓고 아미타여래상을 봉안한 곳이다. 일본의 10엔짜리 동전에 나오는 건물이 바로 이 평등원 봉황당이다.
평등원의 연못은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넓게 퍼져 있고 그 가운데 섬을 만들고 봉황당을 앉혔다. 봉황당이 극락의 표정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이 연못이 큰 몫을 했다.
봉황당의 건물 구성은 불국사 자하문이 양날개를 펴 종루와 경루로 연결된 모습과 비슷하다. 그리고 불국사 석축아래는 본래 봉황당과 마찬가지로 구품연지가 있었다. 1970년대에 복원할 때 석축 앞에 있는 구품연지를 복원하지 않고 흙으로 메워 버린것이다.
봉화당 내부 연화대좌 위에 정좌한 아미타여래상은 너무도 의젓하고 인간적이다.
평등원 보물 전시실, 봉상관
- 운중공양보살상
- 청동 봉황상
- 범종 : 평등원의 범종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으로 꼽히는데, 다른 일본종과 달리 한국종의 영향이 뚜렷하다.
우지강변길 산책
대봉암 : 우지에서 일본의 가장 좋은 차가 나온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우지시에서 운영하는 다실. 일본 다도 체험
우지시 우토로 마을 : 태평양전쟁 당시 교토의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 1,800명은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오지 못하고 황무지 같은 빈터에 조선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참고 : http://blog.naver.com/loverhahana/220717726596
6) 낙중의 육바라밀사와 삼십삼간당
헤이안시대 400년이 끝나고 쇼군의 막부가 지배하는 가마쿠라 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의 유물이 육바라밀사와 삼십삼간당이다.
육바라밀사는 951년 거리의 성인으로 칭송받았던 공야스님이 세웠다.
공야 스님 초상조각, 기요모리 좌상. 공야와 기요모리는 헤이안시대 인물이지만 초상조각은 모두 가마쿠라시대 불상조각을 이끌었던 경파의 불상 제작공방인 '경파불소' 작품들이다. 가마쿠라 시대 명작으로 꼽힌다.
삼십삼간당 천수관음상
삼십삼간당은 실권을 회복한 고시라카와 상황이 기요모리에게 명하여 1165년에 준공한 절이다.
삼십삼간당의 정식 명칭은 연화왕원(렌게오인)이다. 연화왕이란 천수관음의 별칭이다.
참고 : http://samma.tistory.com/2562
제3부 가마쿠라 시대
1) 낙남의 동복사
가마쿠라 시대에 창건된 낙남의 명찰로 교토에서 가장 큰 선종 사찰이다(1239). 수많은 국보와 문화재가 있고 일본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반드시 나오는 절인데다 홍엽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한국 관광객이 이 절을 찾아가는 일은 별로 없다. 우선 교토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17곳에 꼽히지 않았고 교토관광버스 코스에도 들어 있지 않다.
신안해저유물과 동복사
14세기 경 중국에서 물품을 싣고 일본으로 가는 거대한 무역선이었는데 태풍을 만나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난파된 것이다. 화물들 중에서 '동복사 공물'이라고 적힌 물표는 당시 중국과 교역 실태를 보여주는 역사적 물증이다.
일본 역사에서 가마쿠라시대(1185~1333) 150년간은 일본사회가 무인사회로 들어가는 첫 시기였다. 불교의 온갖 종파가 난립하게 되는데, 이 때 송나라와의 교역이 재개되면서 선종이 도입되었다. 도입 초기에 기존 불교계의 강한 견제를 받았으나 무인사회는 오히려 선종을 지지했다.
가마쿠라 시대는 일본문화 전성기인 무로마치 시대로 가는 과도기였고 무인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기간이었다.
삼문, 선당, 본당, 통천교 회랑
동복사 방장 앞의 정원 : 조원 예술가 시게모리 미레이가 1939년에 꾸민 것으로 20세기 정원의 최고 명장 중 하나로 손꼽힌다.
승려 화가 민초가 그린 '대열반도'
2) 인화사와 고산사
고산사는 교토 교외 서북쪽 산악지역인 다카오의 높고 깊은 산 중에 있는 산사이다. 교토 시내에 있는 대찰들과 달리 크지 않고 건물도 서너 채 밖에 없어 산중의 암자 같은 곳이다.
고산사에 소장된 원효와 의상의 초상화는 15세기에 제작된 것이지만 두 스님의 실제 이미지에 가장 가깝다고 추정되고 있다.
화려한 왕실 사찰인 인화사는 에도시대 재건되면서 교토에 있는 명찰들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집대성해놓은 절이다. 오중탑, 마른 산수 석정, 지천회유식 정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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